누구나 좋아하는 밥 반찬 중에 햄이 있다.햄은 특히 어린이들에게 인기이고 최근에는 서양식 정통햄 등이 성인들의 술안주로도 각광받고 있다.이러한 햄이란 원래 돼지 넓적다리 살을 가리키는 말인데 그 부분의 살을 소금에 절여 훈연 등으로 가공한 것을 뜻하는 말이 됐다.인천 최초의 햄은 일본인 다카하시가 1915년 9월 송림동에서 제조한 것으로 인천햄이라는 상표로
인천 최초의 학생 조직은 1911년께에 결성된 경인기차통학생 모임인 한용단을 그 기원으로 한다. 인천에서 서울로 기차 통행이 시작된 시기는 대략 1910년부터이다. 당시 인천 인구는 3만 명이 넘었는데 보통학교 이상인 학교가 인천상업학교 하나밖에 없었고 경인선 개통과 높은 교육열 등이 서울로의 통학을 가능하게 했다. 한용단의 탄생은 1919년 11월 13일
우리나라에 담배가 들어온 시기는 정확치 않으나 사학가들의 견해와 문헌에 단편적으로 나타난 기록들에 따르면 1608년에서 1616년 사이에 일본에서 들어온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인천의 담배공장에 대한 기록 역시 명확하지 않다. 현재는 1899년 말께 미국과 영국이 합작해 설립한 영미연초회사가 담배를 생산했다는 설과 이 회사가 중국 상하이에 공장을 두고 인천
현대적인 창고 업무의 시작은 광무 9년인 1905년 9월6일에 공동창고조례가 발표되고 나서 자본금 15만 원으로 창립한 한성공동창고주식회사가 세워지면서 부터이다.한성공동창고주식회사는 상인에게서 상품을 기탁 받고 보관하는 증서를 발행했으며 상품담보의 대출도 했던 것으로 전해진다.그 후 광무 10년인 1906년 인천과 강경 등지에 각각 출장소를 설치해 창고 업
최근 수년 동안 대형 할인마트가 많이 생겨 재래시장의 입지가 점점 좁아지고 있다.이를 극복하기 위해 각 자치단체 등에서는 다양한 재래시장 활성화 사업을 전개하고 있는 실정이다.그러나 여전히 재래시장은 인간적인 냄새가 나는 곳이라는 인식으로 찾는 이들이 끊이지 않고 있다.인천에 3일장이니 5일장이나 하는 정기 시장이 아닌 근대적 상설시장이 들어선 것은 189
한국 사람들에게 유난히 사랑받는 술 가운데 하나가 소주이다.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는 이 소주를 우리나라 최초로 대량생산하기 시작한 곳도 인천이다.1919년 10월 우리나라 최초로 기계식 소주양조회사가 설립되는데 일본인이 경영했던 조일양조주식회사가 그곳이다.이 회사의 `금강표'라는 소주는 국내는 물론, 만주와 사할린에도 수출될 정도로 각광을 받았으며 당시의
오늘날에는 지방자치가 발전하며 해당 지역의 언론을 대표하는 지역 신문의 역할도 커지고 있다.그렇다면 인천지역 최초의 신문은 어떤 것이었을까?기록에 나타난 인천지역 최초의 신문은 1890년 1월28일 제물상보사에서 발행한 `인천경성격주상보' 효시이다.인천경성격주상보는 일본어로 제작, 매월 2번씩 타블로이드판으로 발행됐는데 영국과 무역 업무에 종사하던 관련업체
한국인의 일상 식생활에서 빠질 수 없는 것 가운데 하나가 간장과 된장이다.예전에는 각 가정에서 만들어 썼으나 지금은 대규모 공장에서 제조돼 누구나 쉽게 구입해 사용할 수 있다.그러면 이러한 간장과 된장을 대규모로 제조·판매했던 공장은 어느 곳이었을까?기록에 따르면 인천에서 처음으로 일본식 간장과 된장을 양조해서 판매한 사람은 1890년 일본인 `이와에이'이
현대인의 생활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 가운데 하나가 의료이다.기록에 나타난 인천 최초의 서양식 병원은 1890년 10월10일 성공회에서 개원한 성 누가 병원이다.성공회 부속병원이라 할 수 있는 성 누가 병원은 현재 중구 내동 3번지에 위치한 대한성공회 인천내동교회에 위치했는데 당시 기록에 따르면 이 성당이 위치하고 있는 응봉산 남쪽 봉우리를 예전에는 약대인
요즘처럼 건조한 날씨가 계속되면 화재 예방에 대한 목소리가 높아진다.화재하면 누구나 소방서를 먼저 떠올릴 것이다.그러면 인천지역에 처음으로 소방시설이 설치된 것은 언제였을까?인천에 소방서가 설치된 것은 1885년 초로 알려지고 있다.인천에서의 소방시설 및 기관의 설치는 1884년 11월18일 일본인 거류민단이 낸 인천소방단 설치 청원에서 출발한다. 당시 이
인천은 개항의 중심이었으며 이에 따른 외국인들의 출입이 자유로웠다.그렇다면 서양인에 의해 최초로 기록된 인천의 모습은 어떠했을까?기록에 따르면 동인도회사에 근무하던 영국 해군 장교 홀이 기록한 `조선서해탐사기'가 그 최초로 알려지고 있다.주 중국 대사인 맥스웰 대령과 홀의 주요임무는 백령도 해안과 동경 124°46′, 북위 37°50′ 일대의 섬들에 대한
웰빙 붐으로 인해 반신욕, 아로마욕 등이 발전하며 목욕문화가 변화하고 있다.그 가운데 하나가 해수탕인데 바닷물을 데워 목욕을 하는 것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해수탕이라 할 수 있는 것이 인천 월미도에 마련됐었다.조탕(潮湯)이라는 것으로 조탕은 사전적 의미로 바닷물을 데운 목욕물, 또는 그 물을 쓰는 목욕탕으로 쉽게 말해 염분이 있는 온천 정도이다.월미도가 전국
우리나라에 근대적인 판유리 공장이 들어선 곳은 인천이다.한국전쟁 후 우리나라는 복구를 위해 판유리와 비료, 시멘트 등을 3대 기간산업으로 정하공장 건설에 매달렸다.이런 이유로 1957년 2월14일 우리나라 최초의 판유리 공장인 한국유리공장이 세워진다.판유리는 주형과 압연으로 일정한 형상을 만든 후 표면을 연마해 만든 널빤지 형상의 유리를 말한다.기록에 따르
우리나라 최초의 공식적인 이민은 1902년 12월22일 제물포항을 출발한 켄카이호에서부터 시작된다.요즘은 자녀의 교육이나 더 나은 생활을 위한 이민이 대부분이나 당시의 이민은 노동력 확보 차원에서 시행됐다.당시 사탕수수 재배가 한창이던 미국 하와이는 노동 인력의 부족으로 인한 임금 상승의 시기였다.주한 미국공사 있던 알렌은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9
1900년대 우리나라는 신학의 태동기라 할 수 있는 시기였다.이러한 시기를 대변하는 것 가운데 하나가 우리나라 최초의 신학 잡지인 `신학월보'의 출간이다.1900년 12월 김리교회에서 발행한 신학월보는 한글로 표기된 최초의 교회 잡지이자 신학잡지이다.편집은 제물포에서 목회를 하던 미국 감리회의 존스(한국이름 조원시) 목사가 맡았는데 그가 인천에 있었으므로
요즘은 집을 나서면 근처에 시중 금융기관을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각각의 금융기관들이 사세 확장과 고객 편의를 위해 각 지역에 지점을 개설해 운영을 하는 데 따른 편리성 때문이다.그러나 개항 당시에는 이러한 은행 등을 지방에서 찾아보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이런 차원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지점 은행이 시작된 곳이 인천이란 점은 또 다른 의미를 갖는다.우리
우리나라 근대식 군함의 효시로는 1903년 인천항에 닻을 내린 양무호와 그 이듬해 서해안 경비를 위해 만들어진 광제호를 꼽는다.기록에 따르면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군함 양무호가 인천항에 도착한 것은 1903년 4월15일이다.양무호는 1888년 영국 딕슨사가 건조한 3천424t급의 화물상선으로 1894년 일본의 미쓰이물산 합명회사가 석탄운반용으로 구입해 운
바다와 접해 있는 지리적 특성과 내륙으로의 진출입 통로였던 인천은 이러한 여건에 따라 우리나라 최초의 해군사관학교가 세워진 곳이다.1893년 초 조선의 군사제도를 청국식으로 개편하며 고종황제는 영국식 해군 창설을 고려, 조선 주재 영국공사에 해군 창설과 해군사관학교 설립 및 군함 1척의 판매 등의 협조를 요청했다.그러나 당시 영국정부는 조선의 재정사정이 어
개항 이후 다양한 서양 문물이 물밀듯 들어오며 우리나라에도 서구식 신교육이 시도되는데 그 처음이 인천의 영화학당이다.우리나라 최초의 서구식 교육기관인 영화학당은 서양 선교사인 아펜젤러에게서 내리예배당을 인계받아 운영한 조원시 목사에 의해 마련되는데 1892년 3월12일 지금의 내리교회 내에서 전도사 부부와 함께 남자 어린이 3명, 여자 어린이 2명을 모아
개항 이후 화폐의 사용이 늘면서 조선 정부는 화폐제도 정비 차원에서 1883년 7월 처음으로 상설 조폐기관인 경성전환국을 설치하고 1888년부터 신식화폐인 동전을 주조한다.그러나 본격적인 신식화폐의 제조는 1892년 경성전환국이 해체되며 인천시 중구 전동 옛 인천여자고등학교 자리에 설치된 인천전환국이 그 처음이다.인천전환국의 설치는 당시 일본의 세력권내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