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에 빠지는 것보다 더 큰 고통이 있나요?" 영화 ‘러브 액츄얼리(Love Actually, 2003)’에 나온 말이다.

 엄마의 죽음 이후 급격히 어두워진 아들 샘의 얼굴을 보고 아버지 다니엘은 근심에 잠긴다. 엄마 때문에 힘든 걸까 아니면 학교에서 왕따를 당하는 걸까. 걱정하다 못한 다니엘은 샘과의 대화를 시도하고, 결국 아들이 엄마의 죽음 때문이 아닌 좋아하는 여자아이 때문에 고민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된다.

 다니엘은 "난 좀 안심이 되는 구나. 왜냐면 나는 더 나쁜 일일 거라고 생각했거든"이라 말한다. 하지만 아들은 이해할 수 없다는 눈빛으로 이렇게 되묻는다. "사랑에 빠지는 것보다 더 큰 고통이 있나요?"

 사랑을 고통이라 말하는 이는 샘뿐만이 아니다. 영국의 소설가 버지니아 울프(Virginia Woolf, 1882~1941)는 ‘사랑이란’ 시(詩)를 통해 ‘사랑이란 생각이다. 사랑이란 기다림이다. 사랑은 기쁨이다. 사랑은 슬픔이다. 사랑은 벌이다. 사랑은 고통이다. 홀로 있기에 가슴 저려오는 고독, 사랑은 고통을 즐긴다’라고 표현했다.

 미국의 시인 에밀리 디킨슨(Emily Dickinson, 1830~1886)은 "사랑은 하나의 완전한 고통이다. 무엇으로도 그 아픔을 견뎌 낼 수 없다. 고통은 오래 남는다. 가치 있는 고통은 쉽게 사그라지지 않으니까"라고 말했다.

 그리고 여기 한 사람이 더 있다. ‘2015 세계 책의 수도 인천’ 지정을 기념해 기호일보사가 진행하는 ‘인천시민과 명사가 함께하는 애장도서전’의 서른여덟 번째 명사로 선정된 이기우(67)인천재능대 총장이다.

 그는 김형석 연세대 철학과 명예교수가 집필한 「영원과 사랑의 대화」를 두 손에 꼭 쥔 채 그의 사랑이자 고통이기도 했던 기억을 털어놓았다.

# 거제도 소년 이기우, 시련을 만나다

 "살다 보면 누구나 힘든 시련을 겪습니다. 하지만 시련이 반드시 좋지 않은 것만은 아닙니다. 기회가 되기도 하니까요. 제게도 그런 시련과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거제도에서 농부의 아들로 나고 자란 그는 공부를 잘했다. 학교 선생님들은 당시 똑똑한 학생들이 많이 가는 부산고 진학을 권유했고, 그는 당당히 합격했다. 당시 거제도에서 중학교를 다니던 학생 중에 부산고를 간 학생은 이 총장 한 명뿐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가난했다. 돈이 필요했다. 그를 아꼈던 선생님들이 수소문 끝에 입주가정교사 자리를 알아봐 줬고 그는 초등학생을 가르치며 공부를 이어나갔다.

 자기 공부하랴, 학생 공부도 가르치랴 그에겐 시간이 모자랐다. 중학교 때는 제법 똑똑하고, 공부를 잘한다는 소리도 들었지만 공부와 과외를 병행하는 그가 입학과 동시에 대학 입시에 몰두하는 친구들을 따라잡기는 어려웠다.

 "입주가정교사를 하면서 공부를 하니 이도 저도 되지 않았습니다. 내 공부도 못하고 있는데 남을 가르치고 있으니 자괴감도 들고 점점 학업을 따라가기가 힘들어졌던 거죠. 결국 2학년이 되자마자 부산 대연동으로 나와 큰형님이 살고 있는 단칸방에 들어갔습니다."

 이제 제대로 공부할 수 있을 거라는 기대도 잠시, 2학년 1학기 들어 중간고사 둘째 날 그는 쓰러져 버리고 만다. 병명은 결핵성 늑막염. 병원에서는 폐에 동공이 2개나 생겼다고 했다. 결국 고등학교를 휴학하고 부모님이 계신 거제도로 다시 내려간다.

 "제 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기였습니다. 친구들은 좋은 환경에서 부모님의 지원을 받으며 공부에 매진하고 있는데 저만 낙오자가 된 기분이 들었죠."

# 다시 고향 거제도로

 그렇게 거제도 생활이 다시 시작됐다. 일주일에 한 번씩 의사에게 꾸준히 치료를 받으니 아픈 것은 곧 나아졌다. 몸이 회복되고 나니 금방 무료해졌다. 그렇다고 복학해 공부할 정도의 상태는 아니라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책을 읽기 시작했다. 눈에 보이는 책은 다 읽었다고 해도 될 정도였다. 동네에 있는 모든 책을 다 읽어서 옆 동네로 책을 구하러 다니기도 했다. 나중에는 읽을 책이 없어서 ‘세계대백과사전’을 비롯해 ‘의학대백과사전’까지도 세네 번씩 읽을 정도였다.

 "그때 읽은 책 중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에 남는 책이 바로 아흔이 넘은 나이에도 활발하게 활동을 하고 계시는 김형석 교수님의 수필집 「영원과 사랑의 대화」였습니다. 당시 그러니까 1960년대를 두고 ‘영원과 사랑의 대화 시대’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김 교수의 책은 엄청난 인기를 끌었었죠. 정말 많은 사람들에게 널리 읽힌 책이었는데, 사색적이고 서정적인 문체에 깊은 철학적 사유까지 담겨 있어 밤늦도록 이 책을 펼쳐 놓고 읽고 또 읽기를 계속했던 기억이 납니다."

 1964년 고2, 한창 감수성이 풍부한 시기에 만난 이 책은 그의 불안과 외로움을 달래줬다. 밤늦게까지 이 책을 펼쳐 놓고 ‘어떻게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며 허무를 넘어 다시 삶을 긍정할 수 있는가’와 같은 구절을 읽고 또 읽으며 역경이 있지만 당당하게 부딪침으로써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기는 사람이 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품기도 했다.

 특히 이 책은 고난의 극복뿐 아니라 사랑의 의미까지 알려 줬다. 책 후반부에 나오는 ‘어느 구도자의 일기’가 사춘기 소년의 풋풋한 마음을 건드리기에 충분했기 때문이다.

 "신부(神父)와 그를 연모하는 제자의 이뤄지지 못한 러브 스토리가 주된 내용이었는데, 이 이야기를 읽으며 얼마나 애틋한 마음에 사로잡혔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그에게도 첫사랑이 찾아왔다.

# 첫사랑

 그는 동네에서 유명했다. 공부 잘하는 학생으로 알려져 사람들에게 제법 인기가 있었는데, 몸이 아파 휴학을 하고 고향집에 내려와 있다니 딱하게 생각하는 이들이 많았다. 그 중에는 연초 초·중학교 2년 후배도 있었다.

 "우연히 길에서 후배를 만나게 됐고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어가게 됐습니다. 따로 시간을 내어 같이 걷기도 하고 어울리게 됐는데 누가 뭐랄 것도 없이 서로 좋아하는 마음이 생겨 버렸던 거죠."

 첫사랑의 설렘도 잠깐, 그는 고민에 사로잡히게 됐다. 후배에 대한 사랑 때문에 마음이 흔들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날들이 계속됐기 때문이다.

 "이대로 달콤한 사랑에 빠져 있으면 꿈을 놓치게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꼭 그래야만 했을까 싶지만 인생에 대해 근본적이고 본질적인 고민을 하던 때여서인지 사랑 때문에 마음이 흔들리는 상태에서 얼른 벗어나고 싶었습니다. 그러다 결국 고민 끝에 후배를 불러냈고 그만 만나자는 말을 건넸습니다."

 

사랑의 고통도 컸지만 이별의 고통은 더 컸다. 아픔을 아픔으로 이겨낸다는 말처럼 아픔을 더 큰 아픔으로 이겨내기로 결심했지만 쉽지 않았다.

 후배와 헤어지고 그의 방황은 시작됐다. 너무 힘들었지만 그렇다고 힘들기만 할 수도 없었다. 극복을 해야 했다.

 "다시 책을 집어 들었습니다. 책을 보면 제자는 사랑은 하되 결혼을 할 수 없다는 걸 깨닫고 신부(神父)를 놓아주기로 결심하는데 그 방법이 다른 사람과 약혼을 해 버리는 것이었죠. 제 처지와 너무 똑같은 상황이었습니다. 책을 읽고 또 읽고 계속 읽었습니다. 헤어지고 나서도 못 잊어서 후배 집 근처를 밤늦게까지 혼자 맴돌다 오는 일이 이어졌습니다. 사귄 기간보다 헤어진 뒤 마음을 다스리는 데 시간이 더 많이 걸렸었죠. 누구나 젊은 시절에는 풋풋한 사랑 때문에 가슴 아픈 때가 있지 않은가요. 그때의 제가 바로 그랬습니다."

# 세월이 지나가고

 "만약 제가 아무런 고난 없이 공부만 했다면 어땠을까요. 공부만 했다면 절대 하지 못했을 고민을 이 시기에 깊게 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돌이켜보면 그 시간이 있었기에 정신적으로 성숙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이 총장은 책 「영원과 사랑의 대화」가 인생의 좋은 길잡이가 돼 줬다고 말한다. 더불어 살아가는 행복, 존재와 사랑의 의미, 그리고 고통 끝에 얻은 용기와 새로운 희망까지.

 그는 책에서 가장 감명 깊게 읽은 문장을 소개한다. 역시 사랑이다.

 "책에 ‘인간이란 언제든지 사랑의 짐을 지는 동안에 모지고 거친 성격이 둥글고 원만해지는 법이다. 한 번도 사랑의 부채를 져 본 일이 없는 사람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고집의 성품을 고치지 못하는 운명에 빠지게 된다’는 구절이 있습니다. 영원한 것에 대한 그리움과 사랑의 의미를 깨닫고 싶은 사람에게 이 책을 추천합니다. 영원과 사랑에 대한 해답을 얻을 수 있을 겁니다."


# 이기우 총장 프로필
 학력사항
 안양대학교 행정학과 졸업
 부산대학교 교육대학원 졸업(교육학석사)
 경성대학교 대학원 졸업(교육학박사)
 한국해양대학교 명예박사(경영학)
 
 경력사항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전문위원
 교육인적자원부 기획관리실장(관리관)
 한국교직원공제회 이사장
 교육인적자원부 차관
 제14대 한국전문대학교육협의회 회장
 인천재능대학교 총장

 수상내역
 근정포장
 대통령표창
 녹조근정훈장
 황조근정훈장

대담=한동식 정치부장 dshan@kihoilbo.co.kr

정리=조현경 기자 cho@kihoilbo.co.kr

사진=최민규 기자 cmg@kihoilbo.co.kr


기호일보 - 아침을 여는 신문, KIHOILBO

저작권자 © 기호일보 - 아침을 여는 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